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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4 17:09

미국 연방대법원의 혁명



"루스벨트의 뉴딜 추진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연방대법원이었다. 뉴딜의 대부분이 정부에 의한 기업활동과 재산권에 대한 간섭 내지 제한이었기 때문에 대법원과의 충돌이 심했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를 근거로 사유재산권보호를 위해 많은 법률들을 위헌판결하였다. 풀러(Fuller) 대법원장(1880~1910 재임) 당시 15건의 위헌판결이 있었고, 화이트(White) 대법원(1910~1921) 때 13건, 태프트(Taft) 대법원(1921~1930) 때 13건, 휴즈(Hughes) 대법원(1930~1941)의 1937년까지 16건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사법적극주의는 당시의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법부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1930년에 휴즈가 대법원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명망 있던 진보적 법률가 카도조(Cardozo)가 홈즈(Holms)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보수적 다수는 여전히 다수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대공황과 루스벨트의 뉴딜이 시작된 것이다.

1930년에 이미 당시의 상원의 진보적 지도자 노리스(G.Norris) 의원은 9명의 대법원판사가 500여 명의 상하원의원 전체보다도 더욱 강력하다고 대법원을 신랄히 비판한 바 있었다. 1932년 루스벨트의 대통령당선과 뉴딜을 미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으나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거부하였다. 5인의 판사가 주도하는 대법원은 1935년 1월 이후 16개월 동안 무려 13개의 뉴딜입법을 무효화시켰다. 이들 판결의 대부분은 5:4, 혹은 6:3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보적인 민주당 측의 반발은 심각한 것이었다. 뉴딜이 위태로워지지 루스벨트는 1937년 3월 9일 노변담화를 통해 「대법원 개혁안」(Court-Packing Plan)을 제시하였다. 즉, 70세기 되는 대법원판사가 은퇴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70세가 넘는 대법원 판사의 수만큼 판사를 추가임명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을 국민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 제안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노리스(George Norris)나 블랙(Hugo Black) 상원의원 같은 뉴딜주의자는 물론, 코윈(Corwin) 교수와 같은 저명한 학자도 루스벨트를 지지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여론과 위협 속에서 중도적 견해를 대변해 오던 휴즈 대법원장과 로버츠 판사가 브랜다이스-스톤-카도조의 진보파에 합세하여 워싱턴주의 최저임금법을 5:4로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써 실체적 적법절차시대와 경제적 보수주의는 종말을 고하였다. 1937~1941년 사이에 늙은 재판관들이 은퇴하고, 새로운 세대가 대법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스톤 판사는 대법원장이 되었다. 이것은 대법원 사상 가장 큰 규모의 혁명이었다. 1937년 이후의 대법원을 일컬어 '현대 대법원(Modern Supreme Court)'이라고 한다. 특히 1953년 이후의 워렌(Earl Warren)대법원(1953~1969)은 민권 관련 적극주의 시대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시기의 가장 적극적인 판사들의 철학은 19세기 말에서 1937년까지의 소수자의 철학에서 유래한다. 보수시대의 부정적 적극주의에 대하여 반대론을 편 할란(Harlan), 홈즈(Holmes), 브랜다이스(Brandeis), 카도조(Cardozo), 스톤(Stone)은 흔히 '위대한 반대자'(Great Dissenters)라 불린다. 이들이 남긴 반대의견이 대법원의 판결로 확립되는 과정은 미국 대법원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출처: 강경선, 『비교법』,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p.26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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